QT 나눔
제 목 [] 어렸을 때
본문
에스겔 23:1-21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 대해서 말씀 하시는데,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속했음에도 오홀라는 젊었을때 애굽 사람과 동침했고, 그후에는 앗수르 사람과 행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오홀라를 그가 행음했던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김으로 그에게 심판을 행하십니다. 오홀리바는 오홀라보다 더 부패 하였습니다. 그녀는 앗수르와 바벨론 사람과 음행 하다가 그들을 배반하고, 젊었을 때 행음했던 애굽 사람을 다시 욕망합니다. 하나님은 오홀리바가 음행하다가 배반했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오홀리바를 치게 하십니다.
제가 처음 묵상한 말씀은 단어들 입니다. 3절의 ‘어렸을 때’, 8절과 19절과 21절의 ‘젊었을 때’ 라는 단어들 입니다. 두 여인의 행음의 시작이 어렸을 때 (from their youth)부터 였고, 젊었을 때 (during her youth)부터 애굽에서 시작 되었던 그들의 행음이 계속되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이어지고 있는것을 봅니다. 4절에서는, 오홀라와 오홀리바에 대하여, 그들이 내게 속하였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주장이 무색하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두 여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 하시는데, 두 여인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습관처럼 행음을 반복 합니다. 어렸을 때의 습관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렸을 때 어떻게 양육 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행음의 대상을 막대기로 사용하시어 두 여인을 심판 하십니다.
나의 어렸을 때를 되돌아 보다가, 슬프게도 두 여인과 다를바 없었다는 것이 인정 됩니다. 친정 엄마는 저를 임신하셨을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옆집 아줌마를 따라 잠시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고 입덧이 멈추자 교회로 향하던 엄마의 발걸음도 멈췄습니다. 대신에, 엄마는 절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새해가 되면 절의 스님에게 또는 점쟁이에게 찾아가 새해 운세를 묻고, 부적들을 사오시곤 하셨습니다. 올해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한해 운세가 어떤지, 엄마에게 설명을 듣곤 했던 기억들이 있고, 집안의 곳곳엔 부적이 붙어 있었습니다. 베게닢 속에도, 가방속에도, 코트 안에도.. 유난히 병약했던 저에게는 특별히 더 많은 부적들이 함께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젊은 시절도 두 여인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의든 타의든, 무심하게 행음을 반복 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어렸을때는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섯살때 아빠를 잃은 아들은 아빠 대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자 남자 어른만 보아도 달려가 안기던 아들은, 하나님 품에 안기어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 엄마를 잃었던 딸은 대신 나의 딸이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파르르 떨리던 상실의 불안감이 이제는 평안으로 바뀌어 딸도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 나의 두 자녀들의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다가, 내가 어렸을 때와 다른 한가지 차이를 발견합니다. 내가 어렸을때는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그들의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영접 했다는 차이 입니다.
마흔이 되어 하나님을 만난 저로서는,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렸을 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엄마의 품을 찾는 아이의 심정으로, 세상에 눈돌리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심 합니다. 작년에 집안 곳곳에 붙어 있는 부적을 다 떼신 엄마는 이제 막 신앙 생활을 시작하신 신생아라는 생각을 하게되니, 더욱더 정성을 다해 엄마를 돌봐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주십니다. 행음했던 두 여인인 엄마와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다음으로 저에게 다가온 말씀도 단어들 입니다. 6절의 준수한(hansome), 7절의 잘생긴(elite), 12절의 화려한(hansome) 이란 형용사들입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사람의 외모와 지위에 끌렸습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권력이 두 여인에게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여인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포함해서 이 본능에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에스겔 14:4). 내 마음에 들인 우상의 숫자만큼 심판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것도 우상을 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를 돌아 봅니다.
오래전에 회사에서 승진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는 나의 질문에, 남편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답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살짝 남편을 이해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남자가 야망도 없나? 꿈도 없나? 그런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면서, 남편이 현실에 안주 하려는 소극적인 사람으로 순간 느껴졌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라는 흑백논리가 습관이 되어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남편은 회사를 알고, 자신을 알고, 자족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더’ 를 멈추고 ‘이대로’ 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오늘 본문의 두 여인이 마음을 뺏긴 대상처럼, 준수한, 잘생긴, 화려한.. 을 쫒아가는 사람 이었던 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은 세상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려한 속모습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가장 큰 변화는 세상의 화려함이 덜 화려하게 느껴지지 것입니다. 복음서에 때로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함이 더이상 초라함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진 같은, 사고의 체계의 지각 변동으로, 가끔씩은 나의 생각과 결정에 나 답지않은 어색함 마저 느껴 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들어와 마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상으로 부터 돌이킬 수 있는 힘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준수함은, 사람의 인정 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때는 부모님, 청소년기에는 친구들, 청년기에는 남자 친구,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들, 결혼해서는 남편과 자녀들, 그러나 그중 제일 갈구했던 인정은 나로 부터의 인정 이었습니다. 내가 인정이 안되는 나의 모습에 오랫동안 방황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을때,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나를,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나를, 하나님은 내 모습 그래도 안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나를 안아주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그 어떤 준수함 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두 여인이 하나님 대신 사랑한 것이 도리어 심판하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기전 제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그것은 자기애 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내가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왔던 것은 우울감 이었습니다. 자책하는 마음은, 내가 칼이 되어 나를 찌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 사랑은 독이 되어 나를 찌르지 않고 날마다 나를 성장 시키는 효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낍니다. 더이상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 한분으로 족하다는 고백을 주님께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음행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외에 마음을 빼앗긴 대상을 막대로 사용하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기 전에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언제나 회개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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