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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성 과 신학은 어떤 관계인가?
등록일 2008-11-30
작성자 장광원
본문
영성과 신학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고 있으나 그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유진 피터슨의 책을 읽으면서 이 두 단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있기에 함께 나누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영성 과 신학
기독교의 모든 신조와 순종, 증거와 가르침, 결혼과 가정, 여가와 일, 설교와 목회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살아내는데 있다. 영성 신학은 , 하나님에 대한 정보로 추락해 버린 비인격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영성 신학은,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는 프로그램으로 추락해 버린 기능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영성 신학은 따로따로 놀 때가 많은 두 단어가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상(신학)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영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도록 교회 공동체가 기울이는 주의를 가리킨다.
최근 영성에 대한 관심이 급작스럽게 치솟는 것은 주로, (심리학자, 목사, 신학자, 교회 성장 전략가 등이 제시하는) 삶에 대한 정의, 설명, 도해, 명령 등으로 이루어진 건조하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또 (광고업자, 코치, 동기부여 컨설턴트, 교회 리더, 복음전도자 등이 제시하는) 슬로건, 목표, 인센티브, 프로그램 등으로 이루어진 비인격적이고 기능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영적인 갈망에 대해 학교, 직장, 종교 기관 등의 무관심으로 인해 현재 영성은 표류 상태에 있다.
“영성”(spiritual)과 “신학”(theology)은 사로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신학”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을 가리킨다.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게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성”은 신학이 하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 타락하지 않게끔 해준다. “신학”은 “영성”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이 되지 않게끔 해준다. 이 두 단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영성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기울이는 주의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성에만 마음을 쓰고 신학은 내팽개침으로써 문제를 단순화 시키고 싶어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신학만 계속 붙들고 영성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영성은 신학에서 시작되며 신학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사람들, 충만한 구원의 삶을 살도록 뜻하신 사람들의 몸을 통해 표현되는 영성을 떠나서는 참된 신학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진 피터슨의 “현실, 하나님의 세계”중에서-
영성 과 신학
기독교의 모든 신조와 순종, 증거와 가르침, 결혼과 가정, 여가와 일, 설교와 목회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살아내는데 있다. 영성 신학은 , 하나님에 대한 정보로 추락해 버린 비인격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영성 신학은,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는 프로그램으로 추락해 버린 기능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영성 신학은 따로따로 놀 때가 많은 두 단어가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상(신학)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영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도록 교회 공동체가 기울이는 주의를 가리킨다.
최근 영성에 대한 관심이 급작스럽게 치솟는 것은 주로, (심리학자, 목사, 신학자, 교회 성장 전략가 등이 제시하는) 삶에 대한 정의, 설명, 도해, 명령 등으로 이루어진 건조하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또 (광고업자, 코치, 동기부여 컨설턴트, 교회 리더, 복음전도자 등이 제시하는) 슬로건, 목표, 인센티브, 프로그램 등으로 이루어진 비인격적이고 기능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영적인 갈망에 대해 학교, 직장, 종교 기관 등의 무관심으로 인해 현재 영성은 표류 상태에 있다.
“영성”(spiritual)과 “신학”(theology)은 사로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신학”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을 가리킨다.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게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성”은 신학이 하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 타락하지 않게끔 해준다. “신학”은 “영성”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이 되지 않게끔 해준다. 이 두 단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영성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기울이는 주의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성에만 마음을 쓰고 신학은 내팽개침으로써 문제를 단순화 시키고 싶어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신학만 계속 붙들고 영성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영성은 신학에서 시작되며 신학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사람들, 충만한 구원의 삶을 살도록 뜻하신 사람들의 몸을 통해 표현되는 영성을 떠나서는 참된 신학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진 피터슨의 “현실, 하나님의 세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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