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카페
제 목 [] 독자여,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십시오.
등록일 2008-08-02
작성자 장광원
본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증언입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바로 이 성경이 기독교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그 공동체를 성장시키게 하는 성경 독서법입니다. 이 성경 읽기는 단지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에 어떤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식을 형성하게 해줍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시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성경을 읽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손에 쥐어 주면서 “그것을 읽으라”고 명령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좋지 못한 성경 읽기는 기독교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해를 가할 수 있습니다. 독자여, 주의하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막 읽은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물으셨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매우 정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겉으로 보이는 것 바로 이면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하나님 앞에서 적합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한 방 먹이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학자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에서 가져온 두 개의 사랑 계명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정답에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 학자의 성경 지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읽는 방식에는 심각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학자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고 늘어지는 장면에서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묻습니다.
왜 이 학자는 단어의 정의를 원하는 것일까요? 이웃을 정의하면 이웃을 탈 인격화하게 되고, 이웃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사물로 취급하고 끊임없이 분해하고 토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게임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질문으로 이야기를 마치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학자는 그 질문에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더 이상 “누가 나의 이웃인가?”와 같은 개념 정의를 통해서는 다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네가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말씀을 통하여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명령을 하시면서 그 학자를 보내십니다. “가서.....하라.” 네가 읽은 대로 살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이와 같은 인격적이고 참여적인 주의력을 계발함으로써 성경을 바르게 읽는 훈련을 하게 해줍니다. 모든 장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렉치오 디비나”는 경건할지는 모르지만 죽은 예수님을 다루고 취급하는 독서 방식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하고 따르는 친구들의 무리와 교제하는 독서 방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입니다.
독자여, 주의하십시오. 기록된 말씀은 그곳이 원래 사용된 맥락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하게 되는데, 그 맥락이란 바로 살아있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을 읽는 것보다 살아있는 음성을 듣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의 선조들은 오랜 동안 문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기록되는 순간 말이 가지고 있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동시성의 대부분이 사라져버립니다. 즉 말은 기록되는 순간 축소됩니다. 글로 쓰인 말은 입으로 한말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때로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간단하고, 더 많이 통제할 수 있고, 힘들거나 지루한 사람들의 복잡성은 다루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이 입으로 전해진 말보다 기록된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독자여,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에게 편리하거나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생을 축소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세계(뒤얽힌 이야기, 메아리치는 시와 기도, 이사야의 기교 어린 호통과 요한의 놀라운 비전)가 없이는 그 말들은 우리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합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을 따라서” 발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육신이 되신 말씀과 일치하는 삶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막 읽은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물으셨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매우 정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겉으로 보이는 것 바로 이면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하나님 앞에서 적합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한 방 먹이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학자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에서 가져온 두 개의 사랑 계명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정답에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 학자의 성경 지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읽는 방식에는 심각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학자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고 늘어지는 장면에서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묻습니다.
왜 이 학자는 단어의 정의를 원하는 것일까요? 이웃을 정의하면 이웃을 탈 인격화하게 되고, 이웃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사물로 취급하고 끊임없이 분해하고 토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게임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질문으로 이야기를 마치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학자는 그 질문에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더 이상 “누가 나의 이웃인가?”와 같은 개념 정의를 통해서는 다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네가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말씀을 통하여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명령을 하시면서 그 학자를 보내십니다. “가서.....하라.” 네가 읽은 대로 살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이와 같은 인격적이고 참여적인 주의력을 계발함으로써 성경을 바르게 읽는 훈련을 하게 해줍니다. 모든 장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렉치오 디비나”는 경건할지는 모르지만 죽은 예수님을 다루고 취급하는 독서 방식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하고 따르는 친구들의 무리와 교제하는 독서 방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입니다.
독자여, 주의하십시오. 기록된 말씀은 그곳이 원래 사용된 맥락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하게 되는데, 그 맥락이란 바로 살아있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을 읽는 것보다 살아있는 음성을 듣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의 선조들은 오랜 동안 문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기록되는 순간 말이 가지고 있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동시성의 대부분이 사라져버립니다. 즉 말은 기록되는 순간 축소됩니다. 글로 쓰인 말은 입으로 한말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때로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간단하고, 더 많이 통제할 수 있고, 힘들거나 지루한 사람들의 복잡성은 다루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이 입으로 전해진 말보다 기록된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독자여,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에게 편리하거나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생을 축소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세계(뒤얽힌 이야기, 메아리치는 시와 기도, 이사야의 기교 어린 호통과 요한의 놀라운 비전)가 없이는 그 말들은 우리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합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을 따라서” 발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육신이 되신 말씀과 일치하는 삶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