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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왜 기도하십니까?

등록일 2008-10-14
작성자 장광원

본문

   기도 제목에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집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간청이거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상사에 관한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상황이 정말 긴박할 때는 오직 “주여!”를 외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사를 두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며, 어떤 게 최선인지 미리 아시고 그걸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별로 응답해주시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계속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해답을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면서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예수님의 기도에서 구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리스도 역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에도, 죽음과 맞닥뜨릴 시간이 다가올 때도 큰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땅에 엎드렸다 일어나기를 세 번이나 되풀이 하며 인내의 한계에 이르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들처럼 그리스도 자신도 부르짖음에 응답받지 못하는 아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조사하면서 기도에 관한 핵심적인 의문 하나가 풀렸습니다. “기도가 정말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온 우주를 움직이시는 분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조차도 기도할 필요를 강력히 느끼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도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 대해 주님은 한 점 의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이 기도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는 현실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어미는 병든 아이를 구세주 앞에 내밀었고, 거동이 불편한 거지들은 소리 높여 거룩한 이름을 불렀으며, 남편을 잃은 여인들은 그분 앞에서 눈물을 쏟았고, 마귀는 시시때때로 집적대며 원수들은 조용히 틈을 노리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눈을 돌리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조건 아래서 기도하셨던 예수님께도 기도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모두들처럼 예수님 역시 기도에 응답받지 못할 때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그 기도가 아직도 응답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기 위해 밤새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구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도 특별할 게 없는 열두 명을 놓고 볼 때 어떻게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훗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분노하시며 탄식하셨기 때문입니다(마17:17).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주님이 처음 드리셨던 기도가 그대로 응답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몰라보게 부드러워져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메시아가 고난당하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시몬 베드로는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었으며, 가롯 유다 역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을 한데 묶어서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보통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에 간섭해주시길 바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서 개입을 절제하신다는 아버지의 성품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녀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기도의 태생적 한계를 유난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수탉이 울기 전에 세 번이라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신 예수님은 사단의 계획을 미리 차단하시거나, 적어도 베드로에게 초능력을 주셔서 시험을 이기게 해주시는 대신에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미적지근한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 간구하셨던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베드로의 사례는 유다에 관한 기록과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둘 다 주님의 신임을 받던 제자였고 똑같이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고 교회의 기둥이 된 반면, 유다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험을 이겨내든 실족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기도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2의 유다가 되는 것을 막아 주신 것입니다.

   욥과 유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인류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결정적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악한 일을 도모할 때, 잔혹한 군주가 백성들을 압제할 때, 배신자가 독생자를 넘겨줄 때 어째서 하나님은 “두 손 놓고 앉아만”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자유를 파괴하는 악과 자유를 존중하는 선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마가복음 9장의 악한 영에 붙잡힌 소년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말살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내면에 들어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신 것을 볼 때, 우리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한 기도에는 인간의 자유를 무한정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뿍 담겨 있습니다. 유다를 위한 기도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등을 돌리실 것임을 미리 아셨지만 예수님은 무리하게 상황을 되돌리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면서까지 상대방의 자유의사를 깔아뭉갤 생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 앞에서도 역사의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다만, 배신이나 죽음마저도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편입되기를 줄기차게 요청하셨을 따름입니다. 베드로를 위해, 유다를 위해, 세상을 위해 주님은 그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의 “기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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