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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당신은 성경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등록일 2008-07-06
작성자 장광원
본문
당신은 성경을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권위 있는 방향 제시를 얻고자 할 때 성경 대신 자신의 체험(자신의 필요와 욕구와 감정)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의거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형성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의 대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참 모습으로 형성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어의 본질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최선의 상태에서 인격적이 되고 계시의 특성을 띕니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형성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이 계시는 우리를 어떤 일에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 주기에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입니다.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약 성경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새롭게 기록된 복음서와 서신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우 다른 두 종류의 책에서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음을 알았고, 그 하나의 목소리는 인격적이라는 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목소리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인격성과 계시를 우리가 오늘날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이시며 영속적이고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은 또한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같은 하나님이지만 우리에게 계시하는 방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우리의 나이가 어떠하든,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부르시는 책입니다. 기독교의 독서는 참여의 독서입니다. 우리가 읽는 말을 우리 삶의 내부로 받아들여, 그것이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하는 독서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에서 성경에 흥미와 매력을 느낍니다. 성경이 던지는 지적인 도전에 반응하면서 매우 진지하게 성경을 대하거나,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적 지침 혹은 성경이 주는 영적인 고양을 위해서 성경을 접하면서도, 우리에게 대한 인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책입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이고 또 하나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을 뿐 우리가 성경에 다가가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접할 때 교회가 구성해 낸 성삼위일체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에 삼위일체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비인격적인 독서 방법(지식, 실용성, 영감 위주의 독서 방식)과는 달리 이 방식은 매우 인격적이면서 또한 매우 삼위일체적이나, 삼위일체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독서를 할 때에 얻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신적인 자아를 인생 최고의 권위로 규정하는 이 삼위일체는 성경을 무시하거나 금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경받는 위치에 놓습니다. 새로운 성삼위일체인 이 주권적 자아는 나의 거룩한 욕구와, 거룩한 필요, 거룩한 느낌으로 스스로를 나타냅니다.
나의 욕구는 타협 불가능하며 나의 권리는 내 정체성의 근본입니다. 이 욕구는 나 중심성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내가 축소되는 것에 대항해서 나 자신을 강화해 줍니다. 나의 필요는 나를 실제보다 더 크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에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경우 소비와 획득은 새로운 성령의 열매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느낌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나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도전하는 감정들인 지루함, 상실, 불만이라는 마귀를 축출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배역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나 성경을 없애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필요와 욕구와 느낌을 섬기는 자리에 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도록 평생 동안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너무도 완벽하게 우리의 본성에 맞추어져 있고 너무도 권위 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가 성경을 이 새로운 권위인 거룩한 자아와 교환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구절이나 장을 날마다 읽습니다. 성경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자아를 삶의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해서 잘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책을 먹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권위 있는 방향 제시를 얻고자 할 때 성경 대신 자신의 체험(자신의 필요와 욕구와 감정)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의거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형성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의 대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참 모습으로 형성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어의 본질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최선의 상태에서 인격적이 되고 계시의 특성을 띕니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형성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이 계시는 우리를 어떤 일에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 주기에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입니다.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약 성경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새롭게 기록된 복음서와 서신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우 다른 두 종류의 책에서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음을 알았고, 그 하나의 목소리는 인격적이라는 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목소리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인격성과 계시를 우리가 오늘날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이시며 영속적이고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은 또한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같은 하나님이지만 우리에게 계시하는 방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우리의 나이가 어떠하든,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부르시는 책입니다. 기독교의 독서는 참여의 독서입니다. 우리가 읽는 말을 우리 삶의 내부로 받아들여, 그것이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하는 독서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에서 성경에 흥미와 매력을 느낍니다. 성경이 던지는 지적인 도전에 반응하면서 매우 진지하게 성경을 대하거나,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적 지침 혹은 성경이 주는 영적인 고양을 위해서 성경을 접하면서도, 우리에게 대한 인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책입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이고 또 하나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을 뿐 우리가 성경에 다가가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접할 때 교회가 구성해 낸 성삼위일체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에 삼위일체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비인격적인 독서 방법(지식, 실용성, 영감 위주의 독서 방식)과는 달리 이 방식은 매우 인격적이면서 또한 매우 삼위일체적이나, 삼위일체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독서를 할 때에 얻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신적인 자아를 인생 최고의 권위로 규정하는 이 삼위일체는 성경을 무시하거나 금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경받는 위치에 놓습니다. 새로운 성삼위일체인 이 주권적 자아는 나의 거룩한 욕구와, 거룩한 필요, 거룩한 느낌으로 스스로를 나타냅니다.
나의 욕구는 타협 불가능하며 나의 권리는 내 정체성의 근본입니다. 이 욕구는 나 중심성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내가 축소되는 것에 대항해서 나 자신을 강화해 줍니다. 나의 필요는 나를 실제보다 더 크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에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경우 소비와 획득은 새로운 성령의 열매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느낌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나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도전하는 감정들인 지루함, 상실, 불만이라는 마귀를 축출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배역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나 성경을 없애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필요와 욕구와 느낌을 섬기는 자리에 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도록 평생 동안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너무도 완벽하게 우리의 본성에 맞추어져 있고 너무도 권위 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가 성경을 이 새로운 권위인 거룩한 자아와 교환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구절이나 장을 날마다 읽습니다. 성경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자아를 삶의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해서 잘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책을 먹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댓글목록

장영이님의 댓글
장영이 작성일
자는 QT Life 목요모임 인도자 장영이입니다.
이곳에 글을 올리는 J,C(Joshua Chang, 장광원)는 저의 남편입니다.
책을 많이 읽기에 느끼고 깨닫고 알리고 싶은 좋은 글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올리는데
혹시 이상한 글로 생각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다른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글을 많이 올리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