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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등록일 2008-07-24
작성자 장광원
본문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건이 일어납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인 예수님은, 혼돈을 우주로, 죄를 구원으로, 깨어진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 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수용적인 자세로 듣는 이해력과 습관을 기르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삼위일체는 처음에 성경이 기록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은 성경의 말씀이 책의 지면에서 나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이야기 속으로 예수님을 더 잘 따라가도록 이해력과 습관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이야기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참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 중 하나는, 성경을 자기 주권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성경을 철저히 살아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선포함으로서 그러한 자기 주권성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하게 믿지만 그 권위에 굴복하는 대신 그것을 사용하고 적용하고 관리하며, 그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권위로서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는 교회 속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경과의 첫 경험은 달콤합니다. 그 책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좋아하게 되고, 우리 인생에 대한 건전한 충고와 지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고, 어둡고 외로운 시기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시편 구절 몇 개를 외웁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이 책에 있는 것 전부가 다 우리 기호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먹을 때는 다나 먹은 후에는 배에서 쓰게 되는 것입니다. 듣기도 힘들고 순종하기도 힘듭니다. 성경에는 소화하기 힘든 말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그 어떤 책도 평면적이거나, 체계화 되어 있거나, 신학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살아내는 실재의 계시이며, 거기에서 지배적인 생명의 형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계시에서 진리를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모든 구체적 내용은 성경에서 주어지는 방식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난해하거나 불쾌한 문제를 만나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경을 체계화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해 주는 어떤 설계에 따라서 성경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안다면 더 이상 그것을 읽지 않아도 되며,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방식의 이야기에 속에 우리 자신을 담글 필요도 없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이나 상황과도 더 이상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가장 위로가 되는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가장 당황스러운 책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축소할 수 없으며, 우리가 편안하게 여기는 것으로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를 환기시키고 자극하고 꾸짖고 다듬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며, 우리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 참여하는 자세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완전히 혁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경의 세계가 세속의 세계보다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는 분명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만약 이 세계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낯설고 우리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크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잘못은 성경을 우리의 경험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세계 속에 맞추어져 들어가는 것, 그 거대한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것입니다. 성경의 거대한 세계가 우리 일상에 세계관을 부여하는 과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이라는 작은 세계를 흡수하는 방식을 인식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참여자로서 하나님을 주제로 하는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 성경에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역할을 주시며,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면서 참여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성경의 세계에 들어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주셨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바른 지식은 순종을 통해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참여자로서 성경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여해야만 합니다. 이 성경에 대해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반응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기도하며 이 책을 먹기 위해서는 또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책을 먹는 행위를 거대하고 거룩한 공동체 속에 예전의 개념으로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예전은 시간(성경에 반응해온 2천년의 역사)과 공간(그리스도 안에서 친구인 세계 전역의 사람들) 속의 거룩한 공동체와 함께 순종과 참여의 자세로 성경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당신 혹은 나뿐만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 전체를 그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서 참여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거룩한 공동체는, 각 사람이 성령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들 앞에서 그리고 그들 안에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듣는 것입니다. 충분한 예전적 뒷받침과 지원과 구조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맞도록 그 이야기를 편집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이 성경을 내면화하는 거룩한 공동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건이 일어납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인 예수님은, 혼돈을 우주로, 죄를 구원으로, 깨어진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 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수용적인 자세로 듣는 이해력과 습관을 기르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삼위일체는 처음에 성경이 기록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은 성경의 말씀이 책의 지면에서 나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이야기 속으로 예수님을 더 잘 따라가도록 이해력과 습관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이야기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참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 중 하나는, 성경을 자기 주권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성경을 철저히 살아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선포함으로서 그러한 자기 주권성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하게 믿지만 그 권위에 굴복하는 대신 그것을 사용하고 적용하고 관리하며, 그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권위로서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는 교회 속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경과의 첫 경험은 달콤합니다. 그 책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좋아하게 되고, 우리 인생에 대한 건전한 충고와 지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고, 어둡고 외로운 시기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시편 구절 몇 개를 외웁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이 책에 있는 것 전부가 다 우리 기호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먹을 때는 다나 먹은 후에는 배에서 쓰게 되는 것입니다. 듣기도 힘들고 순종하기도 힘듭니다. 성경에는 소화하기 힘든 말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그 어떤 책도 평면적이거나, 체계화 되어 있거나, 신학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살아내는 실재의 계시이며, 거기에서 지배적인 생명의 형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계시에서 진리를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모든 구체적 내용은 성경에서 주어지는 방식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난해하거나 불쾌한 문제를 만나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경을 체계화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해 주는 어떤 설계에 따라서 성경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안다면 더 이상 그것을 읽지 않아도 되며,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방식의 이야기에 속에 우리 자신을 담글 필요도 없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이나 상황과도 더 이상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가장 위로가 되는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가장 당황스러운 책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축소할 수 없으며, 우리가 편안하게 여기는 것으로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를 환기시키고 자극하고 꾸짖고 다듬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며, 우리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 참여하는 자세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완전히 혁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경의 세계가 세속의 세계보다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는 분명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만약 이 세계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낯설고 우리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크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잘못은 성경을 우리의 경험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세계 속에 맞추어져 들어가는 것, 그 거대한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것입니다. 성경의 거대한 세계가 우리 일상에 세계관을 부여하는 과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이라는 작은 세계를 흡수하는 방식을 인식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참여자로서 하나님을 주제로 하는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 성경에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역할을 주시며,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면서 참여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성경의 세계에 들어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주셨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바른 지식은 순종을 통해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참여자로서 성경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여해야만 합니다. 이 성경에 대해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반응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기도하며 이 책을 먹기 위해서는 또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책을 먹는 행위를 거대하고 거룩한 공동체 속에 예전의 개념으로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예전은 시간(성경에 반응해온 2천년의 역사)과 공간(그리스도 안에서 친구인 세계 전역의 사람들) 속의 거룩한 공동체와 함께 순종과 참여의 자세로 성경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당신 혹은 나뿐만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 전체를 그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서 참여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거룩한 공동체는, 각 사람이 성령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들 앞에서 그리고 그들 안에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듣는 것입니다. 충분한 예전적 뒷받침과 지원과 구조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맞도록 그 이야기를 편집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이 성경을 내면화하는 거룩한 공동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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