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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화 레미제라블 꼭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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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테이블 식구들과 레미제라블을 엘에이에서 보고왔습니다.
한글 자막을 보면 더 뮤지컬형식의 영화가 가슴에 와닿을거 같아서 갔던 영화..
너무나 감동이 컸기에 꼭 보시기를 추천합니다.(현재 LA CGV에서 상영중입니다)
저의 맘과 같은 글을 쓰신 웹사이트의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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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이다. 필자는 작품의 완성도에 놀랐고, 배우들의 경이로운 라이브 노래실력에 놀랐으며, 너무도 분명한 기독교 정신의 표현에 깜짝 놀랐다. 개봉한지 열흘이 넘은 시점이라, 반드시 봐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던 터였다. 큰일날 뻔 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걸작을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뻔 했으니 말이다.
이미 여러 개의 리뷰와 블로그, 기사들을 통해서 영화 ‘레미제라블’ 이 소개되었다. 기둥 줄거리는 물론이거니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예상되는 흥행 성적 등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들이 해소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 왔던 쟝발장의 이야기다. 은촛대를 훔쳐간 쟝발장을 비난하기는커녕, 두 개의 은촛대를 손에 쥐어 주며 사랑을 베푼 한 신부의 너그러운 용서의 의미는 이 영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용서함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한 동안 잊고 살았던 잘못과 실수에 대한 한없는 용서와 헤아림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기도 한다.
프랑스 시민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현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시기상 ‘레미제라블’ 을 개봉하기에 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권을 가진 자들이 부르주아에게만 계속 부를 몰아 주어,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던 시대적 상황은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과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레미제라블’ 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교훈과 깨달음, 감명은 여러 갈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핵심을 생각해보자! 용서의 정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한 사람의 개과천선으로 인한 카타르시스였을까? 아니면 민주주의의 핵심이 되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레미제라블’ 의 근본적인 주제의식은 신의 존재에 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선포하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가장 커다란 핵심이다.
그렇다. ‘레미제라블’ 은 기독교영화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본질을 너무도 훌륭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믿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 중심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바로 일깨워주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신부가 도둑질을 한 쟝발장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 쟝발장이 자신의 죄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하게 된 이유, 쟝발장이 자신을 끊임없이 쫓아다녔던 자베르 경감을 죽이지 않고 다시 살려주었던 이유… 이 모든 이유는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난 후에 거듭남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신실한 믿음 때문이다.
아마 기독교나 천주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나,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고, 이해되지도 또한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일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자신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뿐이다. ‘레미제라블’ 은 기독교영화이지만,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유심히 살펴 보자! 이 영화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는 주인공 쟝발장만이 아니다. 도둑질과 사기로 여관을 운영하는 탐욕스러운 테나르디에와 그의 부인 역시 자신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말한다. 더 놀라운 것은 쟝발장을 쫓던 자베르 경감 역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상당히 강하고 담대한 신앙처럼 보여지는 모습으로, 쟝발장을 반드시 잡아 정의로운 심판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자베르 경감도 하나님을 찾았다. 남들 보기에 크리스찬이고, 자신 역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그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을 용서한 쟝발장의 마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만을 구하며 살았던 탓이다. 자신 스스로 생각했던 정의로움이, 하나님의 근원적인 성품인 사랑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쟝발장 같은 크리스찬도 있지만, 자베르 경감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찬도 수두룩하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지나 가치관이 먼저 앞서는 크리스찬! 만약 그것이 선하고 정의로운 것일 때는 더욱 더 견고해져 결국 아집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속해서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영원한 사랑과 용서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철저하게 엎드려지고 그로 인해 변화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그 어떤 대가도 없이, 요구도 없이 말이다. 세상의 모든 선과 의로움과 긍휼과 사랑은 하나님께로 나온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것들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느꼈겠지만 필자는 기독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더 강조하며 말하고 싶다. ‘레미제라블’ 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자고 말이다. 남북전쟁을 할 당시 링컨 대통령이 자신의 부하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하나님께 우리의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크리스찬을 향한 멋진 조언들 중에 가장 깊이 묵상해 볼만한 말이 아닐까 싶다.
에서 옮겨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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