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유다의 한계
본문
오늘 본문을 보니, 새벽에 움직이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탄들도 새벽부터 모의를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잠도 안 자고 새벽부터 모이는데, 요즘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지 않나 모르겠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예수님이 당하는 고초를 보면서 후회하기 시작한다.
본문에 Remorse라고 되어있는데, 그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이 후회이다.
Remorse is an emotional expression of personal regret felt by a person after he or she has committed an act which they deem to be shameful, hurtful, or violent.
유다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서 무죄한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당하는 고초를 보고서 그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유다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인생이다.
“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유다는 끝까지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행동한다. 유다가 가장 잘못한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짜 누군인지 몰랐다는 것이 그의 잘못이다.
그의 행동은 마치 회개처럼 보인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에게서 받은 은 삼십도 돌려준다. Remorse 후회처럼 사적적 의미의 Repentance회개는 아래와 같다.
Repentance is a change of thought to correct a wrong and gain forgiveness from a person who is wronged.
변화와 용서가 동반되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유다는 후회를 한것이지, 본질적으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 어쩌면 스스로 경건을 모습을 가질려고 노력하며, 또한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는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생각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름 똑똑하다고도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다.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을 보고 분내며 한 말 - 마 26:8~9) 심지어 치밀하고 대담한 사람이기도하다.
요즘 세상의 눈으로보면 괜찮은 사람 중 하나다. 남한테 피해도 안주고 사회에 봉사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실속도 챙기는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잘 사는 사람의 결국이 자살이다. 그러면 또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래겠냐구.” “그래도 양심적이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보다는 더 용감하네.”
요즘, 기독교 나라라고 불리던 미국의 학교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소리를 해도 박해를 당하고, STOP SB48에 대해서 힘있는 미국교회들이 나서지도 못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아마도 유다편이 더 많을꺼다.
그러면 베드로가 유다보다 더 뻔뻔해서 살아있고 유다는 더 양심적이어서 죽은 것일까?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것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유다만큼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든 죄였다.
유다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돌이킬 수도 없었고 어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고 더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유다보다 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미친듯이 울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 예수님을 찾으며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서지 않았다.
하지만, 유다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할려고 했다. 유다는 무고한 사람을 판 죄 때문에 후회하며 스스로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한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끊었다. 더 양심적이어서 죽은게 아니라, 후회하며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끝까지 그는 예수님을 부정했다.
주님을 찾았으면, 아니 그 답답하고 후회되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여,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죄를 지었는데, 주여 어찌하여합니까?”라고 차라리 주님을 한번이라도 찾고 불렸더라면 결국이 그렇지는 않았을텐데…
요몇일동안 게속 화가 났다. 선교사가 죽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데, 마약하다가 죽은 가수는 추모행사를 해줘야한다고 난리고, 동성애자들은 목숨을 걸고서 STOP SB48을 못하게 하는데, 힘있는 미국교회들은 모두들 자기 자리 지킬려고 그냥 침묵만 하고 있고, 학교에서 하나님 이야기는 종교라서 절대하면 안된다고 법으로 나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무기력한 나 자신과 세상에 화가 났다.
그러더니, 어제는 요즘에 꾸지 않던 악몽까지 꾸었다.
악몽을 꾸고난 후, 자신을 내다보니, 너무 내 안에 분노와 세상에 대한 정죄가 많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유다인가 베드로인가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시험에 들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깨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내 안에 주님의 평안이 없어지도록 내가 너무 한쪽에 치우치고 가고 있음을 알았다. 유다의 길을 쫓을 뻔 했다.
화가 나는 일을 듣거나 볼 때마다 기도하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댓글목록

김명희님의 댓글
김명희 작성일
은 삼십을 내 던지며 후회하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