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다 깨닫진 못하지만,
본문
묵상본문 57:1~10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1절)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2절)
‘의인’ 과 ‘무녀의 자식(간음자, 음녀의 씨)’의 삶을 대조하시며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심령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답답하신 가슴과 만난다.
분명, 내게도 그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무지함과 우둔함이 있길래
이 말씀을 내 눈에 넣어주셨나보다.
하나님이 나로하여금 깨닫길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의인은
정로를 걸었다. 그러다 죽었다.
무녀의 자식(간음자, 음녀의 씨) 즉 패역한 사람은
그 의인의 삶을 조롱하고 우습게 보고 그랬나보다.
우상까지 섬기는데도 당장에 죽기는 커녕 오히려 힘이 소성되어 산단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의인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화액을 당하기 전에 죽음을 허락하셨다고 해명해 준다.
사람들은 의인의 죽음이 얼마나 복받은 결말인지도 모르고
악인들이나 의인들이나 죽는 건 다 마찬가지고
오히려 의인이 더 명이 짧고,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은 것 쯤으로 밖에 이해 못한다 한다.
궤휼한 자는, 화액을 면치 못하도록 오래 살게 놓아두는 것이니 각오하는 게 좋겠다고
경고하는 것 같다.
지난 주 주일아침, 아들이 꾸었다는 꿈이 생각난다.
둘째 아들 예서가 일어나자마자 나잇메어를 꾸었다고 울먹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천국과 지옥을 본 것이다.
예서는 좀 경직되어 있었다.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솔져가 든 칼에 죽고
착한 사람들은 모두 도망했는데, 하늘로 올라가서 큰집으로 갔다 한다.
나쁜 사람들은 게임기를 너무 많이 가졌다고, 앞으로는 게임을 안 하겠다고 했다.
꿈에 본 그대로 그림을 그리게 했더니, 아이는 여러장면을 연속으로 그린다.
그 중, 가슴에 확 와닿았던 장면은
십자가를 진 세사람이
죽어서 구름을 타고 천국에 올라가서 큰 집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집 안엔,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아이의 꿈은, 엄마를 너무 부담스럽게 만든다.
...깨닫는 자가 없도다
난 오늘 왠지, 뭔가 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큐티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본문의 의인에게서 한가지를 배운다.
의인은
살아있는 동안 <정로를 행하는 것>에 촛점을 두었지, 멋있는 죽음을 소망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수고한 뒤에 영광을 얻고
헌신에 비례하는 공로를 이 땅에서도 눈에 보이는 훈장으로 달고 싶었다고
아버지께 자백한다.
이러지 말아야지...
내 주제에,
정로를 걷게만 해 주셔도, 그것을 걸을 수 있는 인생을 살게만 해 주신대도
진짜 다행으로 여길테다.
바울은
남들 다 구원시키고도
행여 자신이 정로로 행한 게 아니었을까봐,
그토록 두려워하고 조심스레 걸었건만
·······!
나,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아버지, 나로 정로로 행할 힘을 주시옵소서~!
<적용>
정로로 행할 힘을, 기도로 공급 받자.
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이들 봄방학이다.
내게 여유가 좀 생긴다.
‘성전가서 매일 세시간씩 기도하기’
나머지 시간,
'아이들 데리고 바닷가 가주고, 부지런히 놀아주기' 가
오늘 큐티 적용이다.
고린도전서 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댓글목록

이선희님의 댓글
이선희 작성일
정도로 걷는 것보다
폼나게 걷는 것에 집중했던
저의 모습을 봅니다.
무시를 당하더라도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