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서로 사랑해야 하는 진짜 이유...
등록일 2009-01-03
작성자 심수희
본문
<요일 4:7~21>
오늘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30번이나 등장한다.
20년전에 결혼을 하러 한국에 갔을때
아주 어린 아이가 앙증맞게 노래를 불러대는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쬐그만게 뭘 안다고… 그 아이를 보며 너무 기가 막혔다.
나 또한 자신이 아주 어렸을땐 이런 노래를 많이 들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어느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세상에서도 믿는 우리 못지 않게 사랑, 사랑 타령이 많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엔
항상 눈물, 아픔, 그리고 결국은 버림...등이 수반되곤 한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온통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오늘 말씀을 보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조건 없는, 일방적인 one way 사랑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랑이다.
기껏 사랑을 한 후에 상처와 아픔만 남는,
기껏 사랑을 한 후에 버림을 받게 될까봐 불안해 해야하는
세상 사랑과는 다르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한 자로서
서로 사랑 할수가 있다는 말씀이고 보니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가 생각해 본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 다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부모에게서 보고 자라온 사랑의 방식,
혹은 내가 남에게 받고 싶은 방법대로 남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남에게 칭찬과 말로 표현하는 사랑,
기회만 있으면 불러다가 먹이는 사랑,
두개 갖고 있으면 그중 하나를 나눠주는 사랑,
궂은 일을 자원하여 몸으로 봉사하는 헌신의 사랑,
남의 의견을 더 존중하며 이해해 주고 들어주는 사랑,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눈물로 중보 기도하는 사랑 등등…
삼십번이나 등장하는 <사랑>이란 단어를 볼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내가 사랑할만한 대상을 생각하며 읽으면 아주 은혜가 된다.
내게 상처가 되는 사람, 밉상인 사람을 생각하며 <사랑>을 생각하면
은혜가 아니라 마음에 무거운 돌짝 하나 올려 놓은것 마냥 시임~히 부담이 된다.
그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 없으니 그야말로 <미션 임파시블>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 해답이 있다.
이토록 <서로 사랑하라>고 목이 터지라 외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본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무조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것은 어찌 보면 좀 피상적이다.
그러나 17절 말씀을 볼때
우리에게 유익과 사랑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고로 부끄럽지 않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 (물론 주의 뜻대로 구할때)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요일 4:17)
17절과 상관되는 구절을 찾아 보면...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28)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며 이 부분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크다.
우선 사랑하지 못하는 대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기도가 막히는것을 경험을 얼마나 했던고...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면서 이 원리를 터득한 후로는
정말 사랑하려고 많이 애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로> 해야한다는 말씀이 위로가 된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는 직분상, 위치상으로 볼때
위에 있는 사람이 밑 사람에게만 해야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보니
나부터도 약한 지체들을 돌보는것은 어느정도 쉬워도
교역자님들이나 나의 지도자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얼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수술을 하셨다.
이멜로 안부를 드리려다가 잠깐 망설여졌었다.
그 정도의 목사님이시라면
많은 이멜과 안부 소식을 넘치도록 받으시기 때문에
내 이멜 정도는 도리어 귀찮아 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멜을 드렸더니
며칠후에 뜻밖에도 내게 그러시는것이었다.
내가 보낸 이멜이 두번째이자 마지막 받으신 안부 이멜이었다고…
올해엔 윗분들에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말고
이멜로 더욱 나의 사랑과 안부를 전하자.
(섬기는데 돈과 시간이 한계가 있으니 이 방법이 젤 만만하므로...)
특히 교회의 목사님과 교회의 큐티 팀장이신 장로님께 그렇게 하련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대상에게도 용기를 내어 해 보련다.
지체들을 위한 중보 기도가 막히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그날에 부끄럼이 없도록...
(* * *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며 기록해 놓았던 내용을 <카페란>에 올려 놓습니다.)
오늘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30번이나 등장한다.
20년전에 결혼을 하러 한국에 갔을때
아주 어린 아이가 앙증맞게 노래를 불러대는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쬐그만게 뭘 안다고… 그 아이를 보며 너무 기가 막혔다.
나 또한 자신이 아주 어렸을땐 이런 노래를 많이 들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어느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세상에서도 믿는 우리 못지 않게 사랑, 사랑 타령이 많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엔
항상 눈물, 아픔, 그리고 결국은 버림...등이 수반되곤 한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온통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오늘 말씀을 보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조건 없는, 일방적인 one way 사랑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랑이다.
기껏 사랑을 한 후에 상처와 아픔만 남는,
기껏 사랑을 한 후에 버림을 받게 될까봐 불안해 해야하는
세상 사랑과는 다르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한 자로서
서로 사랑 할수가 있다는 말씀이고 보니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가 생각해 본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 다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부모에게서 보고 자라온 사랑의 방식,
혹은 내가 남에게 받고 싶은 방법대로 남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남에게 칭찬과 말로 표현하는 사랑,
기회만 있으면 불러다가 먹이는 사랑,
두개 갖고 있으면 그중 하나를 나눠주는 사랑,
궂은 일을 자원하여 몸으로 봉사하는 헌신의 사랑,
남의 의견을 더 존중하며 이해해 주고 들어주는 사랑,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눈물로 중보 기도하는 사랑 등등…
삼십번이나 등장하는 <사랑>이란 단어를 볼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내가 사랑할만한 대상을 생각하며 읽으면 아주 은혜가 된다.
내게 상처가 되는 사람, 밉상인 사람을 생각하며 <사랑>을 생각하면
은혜가 아니라 마음에 무거운 돌짝 하나 올려 놓은것 마냥 시임~히 부담이 된다.
그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 없으니 그야말로 <미션 임파시블>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 해답이 있다.
이토록 <서로 사랑하라>고 목이 터지라 외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본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무조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것은 어찌 보면 좀 피상적이다.
그러나 17절 말씀을 볼때
우리에게 유익과 사랑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고로 부끄럽지 않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 (물론 주의 뜻대로 구할때)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요일 4:17)
17절과 상관되는 구절을 찾아 보면...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28)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며 이 부분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크다.
우선 사랑하지 못하는 대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기도가 막히는것을 경험을 얼마나 했던고...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면서 이 원리를 터득한 후로는
정말 사랑하려고 많이 애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로> 해야한다는 말씀이 위로가 된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는 직분상, 위치상으로 볼때
위에 있는 사람이 밑 사람에게만 해야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보니
나부터도 약한 지체들을 돌보는것은 어느정도 쉬워도
교역자님들이나 나의 지도자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얼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수술을 하셨다.
이멜로 안부를 드리려다가 잠깐 망설여졌었다.
그 정도의 목사님이시라면
많은 이멜과 안부 소식을 넘치도록 받으시기 때문에
내 이멜 정도는 도리어 귀찮아 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멜을 드렸더니
며칠후에 뜻밖에도 내게 그러시는것이었다.
내가 보낸 이멜이 두번째이자 마지막 받으신 안부 이멜이었다고…
올해엔 윗분들에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말고
이멜로 더욱 나의 사랑과 안부를 전하자.
(섬기는데 돈과 시간이 한계가 있으니 이 방법이 젤 만만하므로...)
특히 교회의 목사님과 교회의 큐티 팀장이신 장로님께 그렇게 하련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대상에게도 용기를 내어 해 보련다.
지체들을 위한 중보 기도가 막히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그날에 부끄럼이 없도록...
(* * * 작년에 요한 일서를 묵상하며 기록해 놓았던 내용을 <카페란>에 올려 놓습니다.)
댓글목록

박소범님의 댓글
박소범 작성일
아멘, 아멘...!
신년 큐티, 매일매일 너무 감동적입니다!

윤지현님의 댓글
윤지현 작성일
지난 연말동안 베드로전서를 암송하며
무엇보다고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하는
말씀을 받았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자매님의 나눔을 읽으면서 먼저 안부전화나 이멜로 소식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은 예전에 비해 간단하게 쉽게 얼마든지 안부를 전할 수 있는데도 뭐가 그리 바쁘다고 전화 한통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지...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겠습니다
수희 자매님,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항상 부지런히 큐티를 나눠주시는 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