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부르심에의 확신
등록일 2008-11-09
작성자 박소범
본문
고린도전서 9:1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성도들 때문에 바울 자신의 사도됨이 인침 받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골로새서 1:1)
우리구주 하나님과...그리스도예수의 명령을 따라...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디모데전서 1:1)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 하면 될 것을,
고린도 성도들이 보증해 주지 않아도 예수가 보증인이 되시니까
나는 사도다. 라고 말하면 될 것을,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하면서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알아달라고 이해를 구하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 애처로와 보인다.
그러나, 역시 짧다막한 내 생각···?!
진정 당당하고도 겸손한 사도만이
바울처럼 말 할 수 있다는 것을
묵상 끝자락에서 깨달았다.
사도권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고린도 성도들이 도장 역할을 해서 사도권이 확증된 것이라고
바울은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이다.
양 없는 목자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양의 존재를 존귀히 세워주는 속 깊은 바울의 처신에서
역시 지혜로움···! 하고 감탄사가 나온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사도가, 당당함과 자긍심을 가져도 되는 지
가르쳐 주신다.
너도 바울처럼
그런 사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도전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사도권을 인정 받지 못함으로
두렵고 심히 떨림으로 서 있는 이 자리에서(2:3)
어떻게 이렇게
“너희만은 나를 사도로 인정해야 한다!” 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을까?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열매가 너희가 아니냐?”(1절)
사도의 권을
주 안에서의 열매가 입증해 준다는 사실이
내겐 신선한 발견이다.
하나님이 내 두려움과 떨림을 아시고, 해결책을 주시고 싶으셔서 기회를 보셨나 보다···!
큐티로 제 2의 생명 얻은 은혜에 감사해서
큐티라이프에 사모함으로 머물며, 매주 출석만 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인도자로 세워 주셨고
몸된 교회 나눔방에서 리더로도 세워 주셨다.
이 자리에 있으려고 의도한 걸음이 아니었는데
어느덧, 내가 이 자리에 있다.
멋모를 땐, 큐티사역이란 건
적성에 맞게, 책상에 앉아 성경만 읽으면 되는 줄 쉽게 생각했는데
이거 아무나 하는 일 아니란 걸, 어느순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때부터 큐티에, <사역> 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무서워서
큐티<일> 이라고
말하고, 쓰면서
얼버무려 오고 있었던 이유도
책임을 좀 회피해 보려는 심중에서 나온 두려움의 일면이었다.
내 삶에 자신이 없고, 내가 내 뱉은 말에 책임질 자신이 점점 없어지기에 말이다.
남자목사님은 당연히 많으시고, 여자목사님 여자전도사님도 많은 우리 교회에서
나눔 클래스를 맡으면서
항상
두려움과 떨림으로 교회문에 들어선다.
신학도 하지 않고 실력도 없는 나라서 그분들 앞에서 주눅이 들고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주는 자매들을 혹시나 잘못 인도할까봐 몸 사리는 요즘이다.
언젠가는, 사도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바울 같은 상황에 부닥치는 건 아닐까...?
한두번 걱정해 본 게 아니다.
콜링을 거듭 받아 발 디딘 땅이지만
주의 종들처럼 타이틀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일한다고 월급이 나와서 소속감이 확고한 것도 아니고
힘들고 벅차서 피곤할 때, 위로의 말은 듣고 싶으면서도
막상, 좀 쉬라고 주변에서 거들면...고맙기는 커녕
사명자 분위기 안 난다는 말로 들려서 힘 빠지는...아이러니한 그 기분 !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께는
아무리 지쳐 보여도, 주의 종 관두시고 당분간 쉬라는 위로는 안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주의 종처럼 헌신도 안 되면서
충성 좀 해 보겠다고 한발 앞섰다가
오버하는 것 될까봐
금새 다시 두발 뒤로 물러나서,
여기가 내 자린가...? 저긴가...?
두리번거리는, 그런 아리까리한 위치.
이것이 내가 들어선 평신도사역자의 길에서 엉거주춤했던
지난 한 해의 내 자세였다.
그래도, 엉거주춤할지라도
돌아갈 길은 없다고 생각했던 건
부르심에의 확신 때문이었다.
그 확신이 없었다면
관둬도 벌써 열 번은 관뒀을 것이다.
그 어떤 핑계로도 내 멋대로 관둬서는 안 될 일임을 깨닫고
막힌 환경 속에서도, 구멍을 찾아야 했던 것도
부르심에의 확신이 분명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바울의 사도된 자세는
이렇게 어정쩡한 내게, 묘한 용기를 준다.
주 안에서 보여드릴 열매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받는 사도요,
양들 앞에서는 당당한 사도 라는 가르침이
내 말씀으로 와 닿아서이다.
내가 아직도, 사역 이라는 단어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십자가를 지기 싫어한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 복음 아래 종 된 삶을 기피한다는 사실 밖에 안 된다는
엄위한 음성으로도 들려서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볼까 한다.
신학을 하란 말씀 안 주시니, 할 생각은 여지껏 해 본 적이 없고
김은애 권사님처럼 순결함도 실력도 없어 앞이 캄캄하고
수희자매처럼 깨끗함과 견고한 믿음도 없어 하나님께 면목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없고없고없지만
이제,
나는 내가 부르심 입은 자 된 것을
부끄럽지 않게, 말 할 수 있어야 함을
알았다.
스스로 사도된 자긍심을 갖는 것이
푯대만을 향해서 끝까지 달음질하는 자에게
얼마나 튼튼한 운동화 역할을 하는 지
이번에,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게도
하나님께 보여드릴
주안에서 작은 열매가 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동역해 주심으로
주 안에서 또 하나의 열매가 맺히면
그것을 도장으로 여기고
나는 평신도이지만
당당히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용>
고린도성도들에게
너희로 인해 내가 주안에서 사도로 인침 받았다며
그들 없인 사도권이 보증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도바울의 겸손하고 담대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지고, 교훈을 얻는다.
지난 한해
내가 연약해 질 때 마다 일어 설 수 있도록
주 안에서 사랑 받는 자로 나를 인쳐 주셨던
김권사님과 지연전도사님 등 도움의 손길된 한분한분 이름을 부르며
매일매일 축복기도를 할 것이다. (40일 기도에 특별 추가!)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함으로
그분들의 사역과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로 일년치 은혜에 보답하길 원한다.
댓글목록

심수희님의 댓글
심수희 작성일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을 몰라요? ^^
소범 자매님께서 맺은 열매들이 큐티 라이프에서
여러 모양으로 섬기고 있는데 그런 말씀하심
저는 어디론가 잠수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그 열매들이 박소범 자매님을
<큐티 사역자>로 도장 쾅! 찍어 주셨는걸요.
그리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장으로...
쾅! 쾅! 쾅!
저는 이만 잠수... 꼭로로옥 ~

이선희님의 댓글
이선희 작성일
ㅎㅎㅎㅎㅎㅎ
<사명자 분위기>
완전공감이에요!
누구도 못 그만두게 할것같아요.
열매 집사님 화이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