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나도 그리했으니...
등록일 2008-07-20
작성자 김(심)수희
본문
<벧전 2:18~25>
종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주인들을 선택했을리는 만무하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이 운명적으로 만난 주인이 선하고 관용하는자들만 있었겠는가?
박해가 가장 심했던 그 당시 까다로운 (harsh) 주인들이 엄하고 혹독하게
부리기도 하며 종들을 억울하게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나보다.
애매한 고난을 거론하는것을 보니…
애매하게 (unjust) 고난을 받는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씀이 상전과 종의 관계에만 국한되겠는가?
나의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이곳 낯선 땅에 떨어졌다.
하루 아침에 천지개벽을 하듯 이땅에서의 삶은 충격과 고난, 그 자체였다.
미국 아이들에게 받은 놀림 보다도 같은 처지에 있는 아시안계, 그때 쏟아져 들어온
월남 아이들과 그외의 소수 민족에게 받은 핍박은 말도 못하다.
나보다 일,이년 먼저 미국에 온 그들이 받은 수모로 인해
자기보다 더 늦게 온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 하기 일쑤였다.
내성적인 나는 꾹 참으며 마음의 상처만 깊어갔고 사람들이 무서웠다.
미국 아이들이 친구하자며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도,
“저들도 언젠가 나를 놀려대겠지” 하는 마음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그때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였다.
길을 잃어 제 갈길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그 어느 누구하나
방향을 제시해 준다거나 위로해 주는 사람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사람들이 공포스럽고, 다니는 학교가 지옥 같아도,
영어가 자신이 없고 너무도 내성적이라 말 한마디도 발설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를 않아서 입 꾹 다물고 그렇게 몇년을 견뎠다.
애매히 (불공평하게,억울하게) 고난을 받아 마음이 슬퍼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면 아름답다는데…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은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을 만나 더 이상 길 잃은 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애매히 받는 고난을 하나님 생각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예민한 사춘기때부터 맨날 나를 업신여기는 말만 들으면서 생긴 열등감이
아직도 잠재하고 있는것일까?
업신 여기거나 근거 없는 말, 무례한 말에 무척이나 민감해진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이 빈정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약점을 드러낸 일이
수개월이 지났건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냥 피하고 싶어요’란 변명을 하나님께 늘어 놓으면서 슬슬 피하곤 한다.
그런 말이 들릴때 때로는 되갚음함으로 경솔한 짓을 할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상처 받고 싶지가 않아서 피해 버리기가 일쑤이다.
이제는 나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양이라면,
내게 본을 끼쳐 그분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분을 만난자답게
좀 달라져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먼가보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하나님)에게 부탁하시는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가 그리했으니 너도 그리하라”시고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시며 다독거리신다.
<오늘의 적용, 실천>
힘들때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멸시 받는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조차도 감사함으로 받아 들이자.
나도 부주의한 말로 남에게 애매한 고난거리를 제공하는 죄를 짓지 말자.
종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주인들을 선택했을리는 만무하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이 운명적으로 만난 주인이 선하고 관용하는자들만 있었겠는가?
박해가 가장 심했던 그 당시 까다로운 (harsh) 주인들이 엄하고 혹독하게
부리기도 하며 종들을 억울하게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나보다.
애매한 고난을 거론하는것을 보니…
애매하게 (unjust) 고난을 받는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씀이 상전과 종의 관계에만 국한되겠는가?
나의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이곳 낯선 땅에 떨어졌다.
하루 아침에 천지개벽을 하듯 이땅에서의 삶은 충격과 고난, 그 자체였다.
미국 아이들에게 받은 놀림 보다도 같은 처지에 있는 아시안계, 그때 쏟아져 들어온
월남 아이들과 그외의 소수 민족에게 받은 핍박은 말도 못하다.
나보다 일,이년 먼저 미국에 온 그들이 받은 수모로 인해
자기보다 더 늦게 온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 하기 일쑤였다.
내성적인 나는 꾹 참으며 마음의 상처만 깊어갔고 사람들이 무서웠다.
미국 아이들이 친구하자며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도,
“저들도 언젠가 나를 놀려대겠지” 하는 마음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그때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였다.
길을 잃어 제 갈길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그 어느 누구하나
방향을 제시해 준다거나 위로해 주는 사람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사람들이 공포스럽고, 다니는 학교가 지옥 같아도,
영어가 자신이 없고 너무도 내성적이라 말 한마디도 발설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를 않아서 입 꾹 다물고 그렇게 몇년을 견뎠다.
애매히 (불공평하게,억울하게) 고난을 받아 마음이 슬퍼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면 아름답다는데…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은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을 만나 더 이상 길 잃은 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애매히 받는 고난을 하나님 생각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예민한 사춘기때부터 맨날 나를 업신여기는 말만 들으면서 생긴 열등감이
아직도 잠재하고 있는것일까?
업신 여기거나 근거 없는 말, 무례한 말에 무척이나 민감해진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이 빈정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약점을 드러낸 일이
수개월이 지났건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냥 피하고 싶어요’란 변명을 하나님께 늘어 놓으면서 슬슬 피하곤 한다.
그런 말이 들릴때 때로는 되갚음함으로 경솔한 짓을 할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상처 받고 싶지가 않아서 피해 버리기가 일쑤이다.
이제는 나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양이라면,
내게 본을 끼쳐 그분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분을 만난자답게
좀 달라져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먼가보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하나님)에게 부탁하시는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가 그리했으니 너도 그리하라”시고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시며 다독거리신다.
<오늘의 적용, 실천>
힘들때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멸시 받는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조차도 감사함으로 받아 들이자.
나도 부주의한 말로 남에게 애매한 고난거리를 제공하는 죄를 짓지 말자.
댓글목록

김 민 재님의 댓글
김 민 재 작성일
그래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깊은 뜻이 있으니까, 온유와 겸손을 예수님께
더욱 더 배우도록 노력 하자구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