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화장실에서 벗기신, 가면
등록일 2008-06-28
작성자 박소범
본문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 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9>
<더 나가지 못 할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이 어리석음을 드러내어 주시는 것
그것이, 악으로 더 나가지 못 하게 하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혜임을 알게 된다.
얀네와 얌브레...
나도 하나님이 막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술사같은 기도를 하고 있겠지...
하나님이 수치에 처하도록 드러내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애굽의 종노릇하고 있었겠지...
부모를 거역하며...(디모데후서 3:2)
아, 그러고보니, 큰아들 준이 어제 정말 나를 많이 약 올렸었구나.
어제, 아들이 내게 희한하게도...말대꾸를 많이 했다.
무슨 말만 하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내 영어가 make sense가 안 된다느니...
요즘들어 부쩍 그러더니, 어제는 좀 심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내가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그냥 받아 준다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어디--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하냐고! 꼼짝도 못하게 했을텐데...
그렇게 하는 아들의 방종?을 억지로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아들로 하여금 그냥 그런 것들을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하나님이 더 나가지 못하게 하라, 하실 때까지.
그러던 아들이 늦은 오후, 큐티한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엄마, 오늘은 싸우면 안 되는 날이야. 말씀에 그랬어.”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 생겨도 우리식구들 다 nice 해야 돼! 알았지?”
“그래! 근데, 엄마는 오늘 승리했는데, 벌써!”
“어떻게?”
“너가 아까 계속 엄마한테 말대꾸하고 엄마 한테 잔소리하고 그랬는데,
엄마가 다 받아주고 화 안 냈지? 그런 일이 있었는 지도 몰랐지? 너?”
그랬더니, 아들은
“어, 진짜네~” 한다. 그러더니, 곧,
“ I'm sorry! " 한다.
요즘, 우리 아들 미안하다 소리 금방 잘 안 한다.
조금전 까지 나를 놀려 먹던 아들이, 큐티했다고...
그러고보면, 나도 오전에, 큐티 모임 가서,
멤버들끼리 우리의 부족함을 나누고, 함께 통성기도하고 헤어진 것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아들의 언행을,
고스란히 받아 걸러낼 수 있었던, 에너지 만들어 준 통로였음을 무시할 순 없다.
아들이 다섯 살...금요철야 예배 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좀 참을성 없이 굴었다고
화장실에 데려가서 협박하고 엉덩이를 때릴 때,
어떤 여자목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섰다가,
절대 율법으로 키우지 말라고 너그럽게 말씀 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게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때부터, 그렇게 키우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서 마음에 앙금이 깊어 질 수록
남편에게 화가 나면 아들을 나도 모르게 더 세게 잡는 엄마가 되어 갔다.
그랬으니, 내 바램과는 정 반대로,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뜬히 누르고
아들은 아빠 몫까지 두배로 엄마에게 당해야 했다.
2년을 꼬박 실패했는데,
신기하게도, <정식? 큐티라이프 큐티>를 시작한 이 후, 큐티는 나를 행동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부터다.
겉으로 행동은 할 찌라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나 때문에
얼마나 절망하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괴로워했던가?
그러나...머리카락 허구헌날 뜯어 낸 보람이 있다.
대머리도 되지 않았고, 나도 변해 간다.
기도 잘 한다고 전도 잘 한다고 칭찬해 주시고,
또 나를 지혜로운 엄마로 착각하고 계셨던 목사님 앞에서,
하나님은 그 오래 전, 그 화장실에서,
<가면 뒤의 내 실체를 드러내심>과
<악으로 더 나가지 못하게 막으심> 즉, 모임에서 꾸준히 오픈했던 것,
이 두가지 모두!
오늘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구성?요소 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고보니, 큐티는, 죄를 <드러나게도 하고>, 죄로 <못 가게도 막으니>,
참으로 유익한 경건의 tool 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교회 구석진 곳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러 가며 아이들을 잡는 자매를 만났다.
우리 일행과 대화 중, 말씀을 봐도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울었다.
그때, 몇년 전 화장실 사건이 생각났다.
나도, 내 경험대로 "율법으로 키우지 말라"고 너그러-ㅂ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은 바울의 자세를 생각나게 하셨다.
지금은 연소하고 염려도 되는 디모데이지만,
장차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주며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러 주며, 믿음의 말들로 디모데를 세워 나가는
바울의 모습으로 그 자매를 대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자세라고 일러 주셨다.
솔직히, 자매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자매의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러고도 남을 만했다.
우리 일행에게 들키게 하시고, 부족함을 입으로 오픈하게 하신 하나님이
자매를 더 멀리 가게 내버려 두지도 않으실 하나님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자매가 정말 긍휼히 여겨졌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선하신 안목으로 자매를 보고 계실 것이다.
솔직히, 오늘 본문은 온통 내게 걸리는 것 들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가능성 있는 딸로 여겨 주실 것이다.
오늘 성경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던 여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7절)
우리 큐티하는 아줌마들에겐 절대 그런 안목을 갖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배워서 안다.
항상 배운대로 행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배운 것을 너무나도 잘 까먹는 우리임에도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밖에 없도록 plan을 짜고 계실
<하나님의 열심>을, 나는 신뢰한다.
<적용>
뭐...드러내야 할 것 없나...?
말씀 앞에 날마다 들키자. 그리고 나누자. 은밀해 지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들키면 정말 황당하다.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9>
<더 나가지 못 할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이 어리석음을 드러내어 주시는 것
그것이, 악으로 더 나가지 못 하게 하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혜임을 알게 된다.
얀네와 얌브레...
나도 하나님이 막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술사같은 기도를 하고 있겠지...
하나님이 수치에 처하도록 드러내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애굽의 종노릇하고 있었겠지...
부모를 거역하며...(디모데후서 3:2)
아, 그러고보니, 큰아들 준이 어제 정말 나를 많이 약 올렸었구나.
어제, 아들이 내게 희한하게도...말대꾸를 많이 했다.
무슨 말만 하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내 영어가 make sense가 안 된다느니...
요즘들어 부쩍 그러더니, 어제는 좀 심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내가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그냥 받아 준다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어디--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하냐고! 꼼짝도 못하게 했을텐데...
그렇게 하는 아들의 방종?을 억지로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아들로 하여금 그냥 그런 것들을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하나님이 더 나가지 못하게 하라, 하실 때까지.
그러던 아들이 늦은 오후, 큐티한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엄마, 오늘은 싸우면 안 되는 날이야. 말씀에 그랬어.”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 생겨도 우리식구들 다 nice 해야 돼! 알았지?”
“그래! 근데, 엄마는 오늘 승리했는데, 벌써!”
“어떻게?”
“너가 아까 계속 엄마한테 말대꾸하고 엄마 한테 잔소리하고 그랬는데,
엄마가 다 받아주고 화 안 냈지? 그런 일이 있었는 지도 몰랐지? 너?”
그랬더니, 아들은
“어, 진짜네~” 한다. 그러더니, 곧,
“ I'm sorry! " 한다.
요즘, 우리 아들 미안하다 소리 금방 잘 안 한다.
조금전 까지 나를 놀려 먹던 아들이, 큐티했다고...
그러고보면, 나도 오전에, 큐티 모임 가서,
멤버들끼리 우리의 부족함을 나누고, 함께 통성기도하고 헤어진 것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아들의 언행을,
고스란히 받아 걸러낼 수 있었던, 에너지 만들어 준 통로였음을 무시할 순 없다.
아들이 다섯 살...금요철야 예배 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좀 참을성 없이 굴었다고
화장실에 데려가서 협박하고 엉덩이를 때릴 때,
어떤 여자목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섰다가,
절대 율법으로 키우지 말라고 너그럽게 말씀 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게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때부터, 그렇게 키우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서 마음에 앙금이 깊어 질 수록
남편에게 화가 나면 아들을 나도 모르게 더 세게 잡는 엄마가 되어 갔다.
그랬으니, 내 바램과는 정 반대로,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뜬히 누르고
아들은 아빠 몫까지 두배로 엄마에게 당해야 했다.
2년을 꼬박 실패했는데,
신기하게도, <정식? 큐티라이프 큐티>를 시작한 이 후, 큐티는 나를 행동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부터다.
겉으로 행동은 할 찌라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나 때문에
얼마나 절망하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괴로워했던가?
그러나...머리카락 허구헌날 뜯어 낸 보람이 있다.
대머리도 되지 않았고, 나도 변해 간다.
기도 잘 한다고 전도 잘 한다고 칭찬해 주시고,
또 나를 지혜로운 엄마로 착각하고 계셨던 목사님 앞에서,
하나님은 그 오래 전, 그 화장실에서,
<가면 뒤의 내 실체를 드러내심>과
<악으로 더 나가지 못하게 막으심> 즉, 모임에서 꾸준히 오픈했던 것,
이 두가지 모두!
오늘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구성?요소 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고보니, 큐티는, 죄를 <드러나게도 하고>, 죄로 <못 가게도 막으니>,
참으로 유익한 경건의 tool 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교회 구석진 곳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러 가며 아이들을 잡는 자매를 만났다.
우리 일행과 대화 중, 말씀을 봐도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울었다.
그때, 몇년 전 화장실 사건이 생각났다.
나도, 내 경험대로 "율법으로 키우지 말라"고 너그러-ㅂ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은 바울의 자세를 생각나게 하셨다.
지금은 연소하고 염려도 되는 디모데이지만,
장차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주며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러 주며, 믿음의 말들로 디모데를 세워 나가는
바울의 모습으로 그 자매를 대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자세라고 일러 주셨다.
솔직히, 자매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자매의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러고도 남을 만했다.
우리 일행에게 들키게 하시고, 부족함을 입으로 오픈하게 하신 하나님이
자매를 더 멀리 가게 내버려 두지도 않으실 하나님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자매가 정말 긍휼히 여겨졌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선하신 안목으로 자매를 보고 계실 것이다.
솔직히, 오늘 본문은 온통 내게 걸리는 것 들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가능성 있는 딸로 여겨 주실 것이다.
오늘 성경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던 여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7절)
우리 큐티하는 아줌마들에겐 절대 그런 안목을 갖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배워서 안다.
항상 배운대로 행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배운 것을 너무나도 잘 까먹는 우리임에도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밖에 없도록 plan을 짜고 계실
<하나님의 열심>을, 나는 신뢰한다.
<적용>
뭐...드러내야 할 것 없나...?
말씀 앞에 날마다 들키자. 그리고 나누자. 은밀해 지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들키면 정말 황당하다.
댓글목록

윤지현님의 댓글
윤지현 작성일
소범 자매님의 나눔이 은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들킨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나누기 때문인 것 같아요
화장실에서 들켰을 때 얼마나 얼굴이 화끈했을까...
저였다면 그 목사님을 속으로 원망했을지도...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자매님의 반응과
그 뒤로도 계속하여 말씀대로 살려고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노력한 결과
지금의 소범자매님이 있나봅니다
저도 좀 변했나 싶으면 어느 새 옛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제 모습에
머리 쥐 뜯고 가슴을 치며 낙심할 때 많지만
그래도 미쁘신 하나님께서 친히 저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매일 아침 처진 가슴을 다시 활~짝 펴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