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고난, 구원의 다른 이름
본문
시편 79:1-13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치를 당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고, 죽임 당한 시신들이 들짐승 들의 먹이가 되고, 그들의 장례를 치러줄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요청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조상들의 죄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 드리며,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명예 와도 관련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 상기 시켜 드립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자기 백성도 지켜 주지 못하는 무능한 신이라고 조롱한다고 그는 하나님께 고발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며, 이방인의 악을 일곱 배로 갚아 주시면,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겠다고 서원 합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말씀은, ‘주의’ 라는 소유격 형용사의 반복 입니다. 주의 기업, 주의 성전, 주의 종들, 주의 질투, 주의 이름, 주의 노, 주의 긍휼, 주의 이름의 영광, 주의 크신 능력, 주의 백성, 주의 영예.. 시편 기자의 주의 소유를 고백하는 언어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시편 기자는 왜 이렇게 여러번 반복해서 주의 소유를 강조하고 있을까요. 한 단어씩 따라 읽던 저의 마음속에 질문이 생겨 납니다. 마치 하나님 귀에 메가폰을 대고, “하나님 보세요, 주님의 것 이라고요, 주님의 소유물 들이 이렇게 파괴되어 가고 있다고요, 주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니까요?” 라고 외치고 있는 시편 기자의 모습이 그려 집니다. 이 모든것이 주의 것이니 구원하실 분도 주님 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속으로 성큼 들어가 봅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려 더이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을수 없는 현실과 성전이 파괴되어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시편 기자는 애통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낙담하던 그의 시선이 이제 보이지 않는 주를 향합니다. 그의 시선이 주에게로 향하자, 주의 기업, 주의 성전, 주의 종들, 주의 백성.. 눈에 보이는 무너진 모든 것들이 주의 소유라는 것이 기억 납니다. 주의 이름, 주의 긍휼, 주의 이름의 영광, 주의 크신 능력, 주의 영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너져 내린 것들도 주의 명예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만납니다.
남편 회사에 일이 생겨셔, 잘 해결되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은지 2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해결 인지, 해고 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온 가족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이 상황을 겪으며 회사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7년이란 세월 만큼 안일해 졌던 마음, 하고 있는 일에 익숙해져 수동적 이었던 마음, 신입에 대한 우월감에 교만해 졌던 마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도 불안하기만 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 처럼, 소유격을 ‘나의’ 에서 ‘주의’ 로 바꾸기로 적용 합니다. 주의 가정과 주의 아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주의 사건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주의 아들이 더욱 더 주의 기업에 기여 하도록 성장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이 사건을 살펴 보니, 나도 하나님 것이고, 남편도 하나님 것이고, 가정도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져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남편 회사의 결정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이 시간을 통과 하며, 하나님이 나를 향해 질투 하시는 부분이 있는지, 나에게 기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겠다고 적용 합니다.
두번째로 다가온 말씀은 5절 말씀 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 이까 주의 질투가 불붓듯 하시리 이까. 라는 구절을 읽으며, 주의 질투와 주의 진노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세상에서의 질투는 사람을 죽이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에서의 진노는 세상을 파괴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진노는 하나님 나라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처음 성경을 읽을 때는 질투와 진노의 하나님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 할수록 질투와 진노의 하나님 성품 덕에 지금까지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 하시는 하나님, 사랑으로 질투 하시기 때문에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이제는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의 이면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십년의 세월동안, 주께서 나를 향한 질투와 진노를 멈추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나는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서 마른 가지 처럼 표류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도 죽은 인생을, 멀쩡해 보여도 병든 인생을, 웃고 있어도 슬픈 인생을, 어쩔수 없이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방신을 섬겼고, 세상을 쫒아갔고, 나를 주인 삼았던 나를, 오랫 동안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을 생각 합니다. 주의 질투와 진노가 나에게 구원의 오늘을 있게 하였다는 생각에 이르니, 질투와 진노의 하나님의 성품이 구원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처럼, 내가 사랑으로 질투하고 진노 하여야 할 사람들은 누구 일까요 주님께 질문 드려 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걸까?’ 믿음을 잃어 가는 친구, ‘이 고난이 언제 끝날까요’ 차라리 세상으로 가려고 하는 형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 하려다가 우울증에 걸린 자매가 생각 납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소극적으로 기도만 한 나를 부끄럽게 돌아 봅니다. 겸손을 가장한 게으름으로, 주님처럼 애끓는 사랑으로 질투하고 진노 하지 못했다는 회개가 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으로 질투하고 진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주님께 기도 드립니다. 마음에 생각나게 하신 분들에게 정기적으로 연락을 드려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드려야 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말씀은 12절과 13절 말씀,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라는 말씀 인데요, 주의 구원을 간구하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복수를 청하는 장면 입니다. 그것도 일곱배로 갚아 달라고 요구하는 그의 당당함의 근거가 무엇일지 궁금해 집니다. 더우기,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면,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겠다는 조건부 서원까지.. 왠지 그의 기도가 철없는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부모를 온전히 신뢰하는 어린 아이 같은 기도, 마땅한 기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동네 형아에게 맞고 울면서 달려온 아이가, 엄마에게 그 형아를 혼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입니다.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때린 형아를 혼내줄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아이처럼, 시편 기자가 기도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구원의 요청과 복수의 요청이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그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였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시편 기자의 당당함은 하나님을 아는데서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편 기자의 조건부 서원이 응답 받는데 70년이 걸린 것이 기억 나면서, 조건부 서원의 아쉬움도 발견 합니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 지는데 걸린 70년 동안, 시편 기자는 그의 기도 대로 감사 할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건부 기도 대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이루어 질것을 믿고 기도 했다면, 그는 70년 내내 감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과,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편 4절 말씀이 생각 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카이로스때에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카이로스때에 완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나의 기도와 감사를 되집어 봅니다. 간구하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감사하는, 간구가 바로 감사가 되는, 감사가 바로 기쁨이 되는, 그런 기도를 드려야 겠다고 적용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읽으며 고난이 구원의 다른 이름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부르짖을수 있는 하나님이 계셔서 감사 합니다. 바벨론의 침략, 포로생활, 그리고 포로 귀환 같은 일들이, 저의 삶에도 일어 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과도 같은 일들을,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어나게 하는 일들을, 반복하는 저의 어리석은 모습을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어떤 상황속에서도 제가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소유권이 주님 이시라는 것을 기억함 으로 어떤 상황속에서 기도하며 감사하게 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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