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나눔
제 목 [] 토기장이 권한
본문
로마서 9:14-24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사람이 원하여 애써 노력한다고 받을 수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하여,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완악하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반문 할 수 없는 이유는, 토기장이 이신 하나님께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모든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묵상한 말씀은 17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나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함이라 하셨으니. 라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완악하게 된 바로를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버려두심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시는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 하셨다면, 그는 성경에서 완전 다른 인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춘기 시절에 가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남자 친구 사귀는 것을 반대 하시는 부모님, 일상의 모든 것을 감시 하시는 부모님께 반기를 들며 가출한지 네 시간만에 잡혀 집에 들어 왔을때, 부모님은 크게 한숨을 쉬시며 나를 내버려 두시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학교 앞에 하숙집을 구해 주시며, 이제 부터 하고 싶은 대로 살라 하시며 가버리셨을때, 자유로 인해 춤출줄 알았던 나는 묘한 불안감과 불편함에 더 견디기 힘든 심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한달 만에 내 발로 집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부모님의 간섭을 영접했던, 말도 안되는 결말로 마무리 되었던 나의 가출 사건이 생각 납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었을때, 어른들 눈에 불안해 보이는 여자 친구를 사귀며 거짓말을 시작했을때, 나는 아들의 부정적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서 거의 실신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부모님들 처럼 담대하지 못하여 아들을 내버려둘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가 없어도 붙잡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새벽마다 통곡하며, 아들이 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눈물로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차마 아들을 내버려둠으로 나의 분노를 쏟아낼수 없어서, 아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아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17절 바로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가 나를 완악하게 만든다고 생각 했는데, 내가 스스로 완악해 졌던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들의 사춘기 시절에는 아들이 나를 완악하게 만든다고 생각 했는데, 역시 나는 스스로 완악해진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완악해지면, 하나님은 나를 내버려 두시고, 내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한다면, 나를 바로 처럼 사용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완악해 진다는 것은 누구 때문이 아니고, 나의 죄성에 나를 내어 줄때, 결국 내가 스스로 완악해 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두번째로 저에게 다가온 말씀은 그릇들 입니다. 21절,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의 비유와, 22-23절,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의 비유 입니다. 토기장이로 비유된 하나님은, 같은 진흙 한 덩이(same lump of clay)로 특별한 용도로 쓸 그릇(special purposes)과 평상시 사용하는 그릇(common use)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말씀 입니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다른 용도로 사용될 두 그릇이 같은 진흙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 눈에 띱니다. 특별한 용도로 쓸 그릇이라고 해서 특별한 진흙으로 만들어 진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고 사용 목적이 다를 뿐이므로, 어느 누구도 두 가지 그릇을 귀하고 천하다고 구분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 진노 받아 마땅한 대상 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의 그릇, 영광 받기 위해 예비하신 긍휼의 대상들 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오래 참으시다가 결국 이방인들까지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나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을 받아도 마땅했던 내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덕분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변화 되어서,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그의 긍휼의 그릇을 받게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셔야 마땅했던 반역하는 백성이었던 나를 오래 참으시고 긍휼의 백성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절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을 받게 되었다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일을 사모하며 달음박질 하였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깊은 의미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렸으니, 뒤에 오는 사람을 무시하고, 옆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주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 알거같아 반성이 됩니다. 목적지를 향햐여 가는길에 사람을 살피지 않고 목적만 생각했으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였지만, 그의 긍휼의 마음이 부족했음을 회개 합니다.
나는 스스로 완악해 지는 별수 없는 죄인 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기본값 죄인 입니다. 나를 왜 이렇게 지으셨나고 하나님께 반문하던 죄인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진흙을 사용 하셨는데도, 귀해 보이는 그릇을 질투하며 스스로 천한 그릇이라 자책하던 죄인 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내 모습 그대로 불쌍히 여겨 주셨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나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나를 긍휼의 그릇에 담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나를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나도 남편과 자녀들을 오래 참아 주어야 마땅합니다. 10월 한달간의 한국에서의 친정살이 동안에도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을 받은자 답게, 부모님을 오래 참아 드리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온전히 두분을 섬겨 드릴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토기장이 권한에 대해 묵상하다보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내 삶에 대한 권한이 나에게 있었던것 처럼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주님앞에 회개 합니다. 남편 삶에도 자녀의 삶에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데, 마치 그들의 삶이 내 권한에 속한것 처럼, 그들에게 내 생각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나의 모습을 반성 합니다. 흠 많은 그릇도 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손에 있으면 그 어떤 그릇도 귀하게 사용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그릇에 흠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릇이 하나님 손에 담겨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도, 남편도, 자녀도 하나님 손에 사용되는 그릇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묵상하고 싶은 말씀은 24절 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방인 이었던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 인지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하는 말씀 입니다. 나의 행위나 달려감이나 노력으로 된것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것 처럼, 나의 행위와 우월감이 특권이 될까봐 조심스럽고 두렵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며, 구원의 문을 닫는자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나의 노력으로는 어떤 구원의 문도 열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 앞에서 더욱 겸손히 나를 살펴보아야 겠다고 적용 합니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아들의 고민을 들으며, 엄마로서 신앙과 인생의 선배로서 답을 주고 싶어 입이 저절로 열릴뻔 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아들의 하나님이 생각 났습니다. 엄마에게 말하듯이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 드려 보라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기도해도 되냐고, 너무 유치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너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이렇게 자세히 심지어 유치한 고민까지 다 듣고 싶지 않을까? 기도 할것과 기도 하지 않아야 할것을 구분하는 대신에, 무엇이든 말할수 있는 친한 관계가 되지 싶지 않아? 나의 질문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구원자에게 큐티 묵상을 통해 날마다 질문 드려야 하는 이유는 인생의 모든 답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래 참으심으로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진노,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심을 인정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을 오랫동안 참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의 영광의 풍성함을 매일 큐티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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